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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고린도후서 5장 1절-10절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by 소북소북 2021.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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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장 1절-10절

 

고린도후서 5장의 주제는 4:16부터 시작해서 5:1-5 그리고 5:6-10이라는 두 연속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5:11-21로 이어진다. 5:1-10에 대한 주석은 본문 해석의 역사에서 한 권의 저서가 필요한 만큼 방대하다. 1) 고린도후서 5장에서 바울은 고난의 총체적이며 종국적인 모습인 죽음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울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죽음 후의 삶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있음을 제시하는 것 같다.

 

바울은 5장에서도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호를 빼놓지 않는다. 그 증거가 ‘우리는 갖고 있다’(‘에코 멘’, e;comen, 3:4, 12; 4:1, 7, 13; 5:1; 7:1), ‘우리는 알고 있다’(‘오이다 멘’, oi;damen, 1:7; 4:14;5:1, 6, 11)라는 표현을 계속 사용하는 것이다. 바울은 사도의 직분을 수행하면서 확신 가운데 고난과 핍박을 인내하고 있고, 자신이 하는 사역의 의미와 궁극적인 삶의 최종 지점을 알고 있다. 마지막 단락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 직분을 화해의 직분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 내용을 설명한다.

 

고린도후서 5장의 구조


바울의 사역 목표(4:16-5:10)

1) 겉 사람과 속 사람(4:16-18)
2)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5:1-5)
3) 바울의 확신(5:6-10)

바울의 화해 사역(5:11-7:4)

1) 화해의 직분(5:11-15)
2)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화해 행위(5:16-21)
3) 화해를 위한 간청(6:1-13)
4) 거룩한 삶에 대한 요청(6:14-7:1)
5) 화해를 위한 추가적 호소(7:2-4)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5:1-5)

이 단락은 본론에서 이탈한 막간이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린도후서 4:16-18에 근거를 둔 사상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4:16에서 시작하여 5:10까지를 한 문맥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단락이 죽음을 언급하는 것이지만, 이 죽음은 4장에서 언급된 고난과 환란을 지나온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망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4:16에서 시작하고 있다. 1절은 4:16-5:10의 단락에서 핵심 사상을 전하는 구절이다.

 

 

1절은 한글 성경에서 번역하지 않은 ‘왜냐하면’(‘가르’, ga , r)이란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다. 이 접속사는 앞에 있는 내용과 긴밀한 연관을 시사하고 있다. 이 접속사를 넣어서 번역하면 “그러므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이 된다. 바울이 문법적으로 가정법을 사용하여 진술하고 있다.

 

바울은 70인 역에서 자주 발견되고 신약성서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장막’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케네’(skhnh ,)를 사용하지 않고 본문과 4절에만 사용된 단어 ‘스케노스’(skh /noj)를 사용한다. 70인 역에서 ‘스케노스’는 인간의 몸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한 차례 사용된다. 2) 바울이 사용한 용어 “장막은 피타고라스, 플라톤 이래로 몸을 가리키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바울은 본문에서도 인간의 몸을 비유로 묘사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바울의 관심은 ‘겉 사람’의 낡아짐에 있다. 바울에게 핍박과 고난이 그의 육체에 고통을 안겨준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1절에서 죽음에 이르는 육체의 멸절을 생각한다. 바울이 말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현실적인 육체의 생존을 의미한다.

 

바울은 자신의 장막집이 쉽게 파괴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장막 집이 무너지는 일이 발생해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라고 말한다. 바울이 얼마나 확신을 갖고 사도의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은 무엇인가? 이 집은 성전의 이미지가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을 다시 표현하면서 사용한 말은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이다(참조. 막 14:58; 행 7:48; 17:24; 히 9:11, 24). 이와 유사한 표현은 예수께서 재판받으실 때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비판을 받은 내용인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막 14:58)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이 내용은 요한복음 2:21-22,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에서 그 의미가 수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 뒤에 따라올 부활의 몸을 암시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을 갖게 되는 것은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진 뒤에 일어날 미래의 상황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앞의 표현과 대조적으로 ‘하늘나라’가 아니고 완성된 새로운 몸이며, 하나님의 영의 창조적 능력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참조. 고전 15:37, 42-44,47). 이런 점에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종말에 신자에게 기대되는 ‘신령한 몸’ 즉, ‘부활의 몸’을 암시한다.


이와 같이 1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대구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1절은 지상적인 것과 손으로 짓지 않은 것, 장막 집과 영원한 집을 대조시키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에서 지상적인 것을 몸에 적용한다. 또한 본문과 평행 구절에 해당하는 로마서 8:18-24과 관련해서 해석하는 것이다.

 

 

로마서 8:18-24은 신자들이 경험하는 고난의 주제를 다루며 그 고난과 신자들에게 계시될 영광과 대조한다. 이 영광이 드러나는 때에 신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몸의 속량으로(23절), 이것은 분명히 신자들이 종말에 기대하는 부활의 몸을 의미한다.

 

로마서의 이 단락과 고린도후서 4:16-5:10에서 다루어진 유사한 주제를 고려하고, 로마서가 고린도후서 이후에 기록된 서신으로 생각할 때 사상의 연속성을 기대할 수도 있기에 1절 하반절의 영원한 집은 신자들에게 약속된 부활의 몸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요약하면,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땅 위에서 우리 장막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집을 얻을 것이란 내용이다. 바울은 1절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2-4절의 소망이 있는 것이다. 2절의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 하노라”에 대한 해석도 로마서 8:18-24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로마서에서 신자들은 그들의 몸의 속량으로 해석되는 양자 될 것을 기다리면서 탄식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22-23절). 2절의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 하노라”는 로마서 8:22-23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는 곧 하늘의 영원한 집이다.

 

바울은 이 땅에서 고난과 함께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면서 하늘의 영원한 집을 사모한 것이다. 2절에서 ‘덧입다’는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기대이다. 바울은 죽음 후에 자신을 기다리는 천상의 옷을 덧입기를 갈망한다. 그 방법은 현재의 지상의 몸 위에 덧입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겉 옷 위에 다른 옷을 껴입는 것과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바울은 언제 어디서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인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3절의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에서 바울은 그가 하늘에 거할 때 피하고 싶은 벗음은 육체 없는 영혼이라는 벗음이다. 3절의 해석은 이 단락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바울은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으로서의 실존은 피해야 할 어떤 것으로 간주하였다. 바울이 영지주의적 사상을 배격하고 있는 모습이다.

 

바울이 ‘벌거벗은’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육신이 없는 영혼과 같이 옷이 없는 상태와 가릴 것이 없는 상태, 거처가 없는 상태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옷은 그 옷을 입은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주는 인정의 표지이며 진정한 신원의 표지이다.

 

4절의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염세적인 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의 평생의 길을 의미한다.

 

이 땅의 장막 집에 있는 우리의 상태는 물리적 육체 안에서 환난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상태를 바울은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몸으로 경험하는 환난의 무게 때문에 탄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고난과 핍박의 무게로 탄식할지라도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상태가 되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비유를 사용한다. 첫째 비유는 이미 낡아 없어진 것을 덮기 위한 여분의 옷을 껴입는 비유이다. 둘째 비유는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의해 삼켜져서 더 이상 존재치 않는 변화에 대한 비유이다. 결국 바울이 소망하는 것은 육체적 실존으로부터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하늘의 몸을 입게 되는 것이다.

 

 

로마서 8:23에서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에서 말한 몸의 속량이거나 빌립보서 3:21의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그의 몸이 변화되길 바라는 것이다.

 

5절의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5:1-4의 확신에 대한 단언이다. 바울은 우리의 죽을 몸이 생명에 삼켜지도록 역사하실 분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것의 보증은 성령이라고 언급한다. 4:16-17의 관점에서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한 준비 과정의 일부가 현재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참조. 롬 8:17).

 

바울은 자신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준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객관적 지식과 그가 소유한 성령에 대한 주관적 경험을 통해서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는다. 준비하시는 하나님은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몸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은 것은 성령에 의해서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 각자의 차례가 올 때 그들을 일으켜 부활의 몸으로 입혀 주시겠다는 보증으로 성령을 주시는 분이 또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다.

 

바울의 확신(5:6-10)

6절은 앞부분에서 자기의 덧입으려는 열렬한 기대를 ‘성령의 보증’으로 인정받는 것에서 오는 원리를 요약한 것이다. 바울은 이미 4:16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말했다. 7절의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는 믿음과 보는 것이 대조가 되어있다.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언급한다. 6절의 “몸으로 있을 때”는 하나님이 우리의 시야 밖에 계시다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주와 따로 있다는 것이다. 7절의 표현대로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는 주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요 20:29).

 

 

8절의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는 바울이 현재보다 더 나은 상황을 갈망하고 있다는 고백이다. 8절은 6절의 내용인 항상 마음이 담대하여 든든함을 다시 언급한다. “몸을 떠나”는 더 이상 믿음으로만 주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가시적으로 주를 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참조. 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바울은 자신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상태를 경험하길 원하지 않을지라도 주의 재림에 앞서 그가 먼저 죽게 된다면 그런 상태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참조. 빌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9절의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는 바울 소원의 핵심을 말한다. 바울은 두 가지 가능성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바울이 바라는 것은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바울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바울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10절에서 이 단락을 끝내면서 그리스도의 심판을 언급한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심판대’를 위해 사용한 단어는 ‘베마’(bh /ma)로 그 자리가 고대 고린도 지역에 유적으로 남아있다. 사도행전 18:12-17에 의하면 바울은 총독 갈리(Gallio) 앞에서 바울을 고소한 성난 고린도 지역의 유대인들에 의하여 ‘베마’ 앞으로 끌려 나왔다.

 

하지만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문제에 대하여 재판석에 앉아 그 문제를 처리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바울을 고소한 자들은 ‘베마’에서 쫓겨나갔다. 당시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은 재판을 받는 것으로 바울은 우리의 삶을 정돈하며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 땅 위에서 육체로 살면서 일상의 삶에서 행한 모든 것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평가받는 것은 그 사람이 그 몸으로 행한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이 “주의 두려우심을 아는 것”은 이런 인식의 근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다음 단락에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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