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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사사기 18장 단 지파의 북쪽 이주

by 소북소북 2021.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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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8장 단 지파의 북쪽 이주

서론(삿 18:1)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두 번째 에필로그의 후렴구,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예측케 하는 도구.
18:1 b “그때까지 기업을 분배(히. 노 펠라) 받지 못하였음이라”
더 좋은 일자리 찾으러 다니는 레위인이나, 더 좋은 땅 찾아다니는 단 지파나 똑같다.
분배받지 못한 게 아니라 점령하지 못한 것이다. (1b)

 

단 지파의 불신앙. 비교. 삿 1:34; 참고. 삿 11:23-24
아모리 사람의 압박을 받아서 산지로 쫓겨나고, 그 이후 블레셋 사람이 위협하니까 북쪽으로 올라가 버린다.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굉장히 부정적이다. 민수기, 신명기 다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유업을 포기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포기하면 안 된다.

 

단 지파가 정탐군을 보냄(삿 18:2-10)

18:2(정탐군의 파견) 비교. 수 2장

“소라와 에스다올” 비교. 삿 13:25; 16:31 삼손과 관련된 지명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여리고 성에 파견하는 것과 외형상 같다. 그렇지만 근본적 동기가 잘못되었다.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을 찾기 위해, 이들은 약속받은 땅을 포기하려고 정탐꾼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면서 아주 사명감 없는 레위인으로부터 그 확신을 찾고 있는 것이다.

 

“레위 청년(히. 나아르)의 음성을 알아듣고(18:3)”
레위 청년이 베들레헴 출신임으로, 단 지파도 그 근처. 어, 우리 지역 사투리 쓰는 사람이네.. 하고 알아본 것이다. 그에게 묻는다.

 

18:3 b-4(단 지파 사람들의 질문과 레위인의 대답)

질문(3b절)
대답(4절): “나를 고용하여” 고용했다 라는 것은 돈 주고 샀다는 것이다. 스스로 돈에 팔려 다니는 제사장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제사장은 어느 누구 한 사람에 의해 고용되는 직분이 아니다.

 

18:5 레위 제사장에게 신탁을 요청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은 이미 분명하다. 분배받은 땅을 지키는 것이다. 참고로 레위인의 사명은 우림과 둠림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율법을 가리키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18:6)” ⇨ “매우 경박한 답변” (D. Block).듣기 좋은 말 그대로 뱉어 버린다. 사실은 이 레위인도 17장에 나온 것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표현 자체가 모호하다. 여호와 앞은 하나님의 허락도, 심판도 의미할 수 있다. 성의 없이 모호하게 말한 것이다. 그리고 단 지파 삶들은 자기들 좋을 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거짓된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단 지파 사람들이 라이스라는 지역에 도착한다.

 

“라이스(18:7)”

라이스는 에브라임 지역에서 150킬로 떨어진 북쪽에 있는 지역이다. 이스라엘 영토의 북쪽이다. 사사기 저자가 라이스 지역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 묘사한다.

 

“염려 없이(르베타) 거주하며” 서로 신뢰하는 것이다.


“평온하고(샤카트) 안전하니(베타)” 사사가 구원을 이루고 난 이후 전쟁이 없는 상태가 평온이다. 기드온 이후로 더 이상 이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는데, 이스라엘 사회에 없는 신뢰와 평온이 이방인들에게 있는 아이러니이다.

 

7b절 “그 땅에는 부족한 것(히. 마클 림)이 없으며 부(에체르)를 누리며(개역개정)”

 

“그 땅에는 권세 잡은 자가 없어서 무슨 일에든지 괴롭게 함이 없고(개역)” 원문에 적합

① 침략 행위 ② 다스리는 왕 ③ 부족함이 없다.

이방 사람들을 묘사하는 말이다. 이방 사람들이 더 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 왕정에 대한 저자의 비판 암시. 왕이라는 존재가 만들어지면 거기에 권력이 형성되고 그 밑의 백성들은 힘들다. 왕정에 대해 부정적이다. 왜 왕이 필요한가? 하나님이 왕이신데 왜 별도의 인간 왕을 세우려고 하는가?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통치를 받고, 그를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다스림 밑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통치를 거스리는 사람이 있다면 제거해 버려야 한다. 그런데 지도자들이 오히려 그런 모습을 보인다. 왕처럼 군림하려는 모습. 인간 왕 때문에 진짜 왕이 안 보이는 것이다. 담임 목사님 때문에 예수님이 안 보이는 것이다. 왕이 했던 똑같은 실수를 하는 것이다.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소개하고 백성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인도자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왜 인간을 영웅화하는가?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며... 상종하지 아니함이라(18:7 b)”


시돈 사람들은 라이스 거민들과 같은 동족 사람들이다. 그런데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인데 군사적 동맹을 맺은 사람들도 없다. 단 지파 사람들의 잘못, 잔인함을 부각하는 것이다.

 

 

 

 

18:8-10(정탐군의 보고)

9절 가나안 땅을 묘사할 때 한 표현. 그런데 자신들의 유업을 포기하면서 그 땅을 매우 좋더라. 마치 약속의 땅인양 표현하는 아이러니. 10b 라이스 거민을 또 평화로운 백성, 서로 신뢰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씀. 마치 자신들이 거룩한 전쟁을 치르는 용사들인 것처럼 말하고 잇다. 사명감 없는 제사장의 신탁에 근거하여. 그것도 모호한 신탁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단 지파의 역할은 불레셋의 침입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는 역할. 단 지파가 자기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블레셋이 치고 올라오는 것이다.

 

단 지파의 원정(삿 18:11-20)

단 지파의 여정(18:11-13)

단 지파의 용사들 600명이 에스다올에서 출발. 에브라임 미가의 집에 도착한 내용.


“단 지파 가족 중 600명(18:11)”

 

단 지파의 신상 탈취(18:14-20)

전에 라이스 땅을 정탐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이 집에 에봇과 드라비과... 너희가 아느냐. 그런즉 이제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 마땅히 행할 것은 이것들을 훔치는 것이다. 아이러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것들을 없애는 것이다.

 

18:16-19a(협박과 무력으로 신상과 제사장 직을 빼앗음)

위협하는 것이다. 17절 b 무기를 지닌 600명을 반복. 무력으로 강탈함을 강조하고 있고, 제사장은 그냥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때 18b 제사장 한 마디 한다.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그다음에 단 지파 사람들이 강하게 나오니까 아무 소리 못한다. 그러면서 단 지파 사람들이 이 사명감 없고 자신들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제사장에게 제안한다.

 

18:19 b-20(단 지파 사람들의 제안과 레위인의 수용)

 

제안(19b절):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돼라(18:19)”
수용(20절): “마음에 기뻐하여(18:20)” 비교. 삿 17:6.

 

미가가 이 전에 이 사람에게 했던 동일한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 어느 것이 좋은가? 제안하는 것이다. 이 제사장이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와 같은 표현. 이것이 내게 유익한가, 그렇지 않은가만 생각하는 것이다. 제사장이라는 사람도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는 그 원칙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단 지파 사람들이 이 제사장을 왜 데리고 가려고 하겠는가? 17장의 미가의 생각과 같은 것이다. 잘못된 믿음 때문에 그런 것이다. 야웨 신앙의 철저한 왜곡이다. 야웨 신앙의 특징은 윤리성이다. 그는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 그의 백성들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하는데, 그 삶은 무시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만 바라고 있는 모습ㄴ이다. 윤리 종교를 기복 종교로, 무속 종교로 변질시켰다. 그런 현상들이 지금 많이 발생하고 있다. 이 땅에서 축복을 누리고 사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단 사람들의 협박(삿 18:21-26)

18:22(미가의 추격)

훔쳐 간 것을 뺏어 오려고 미가와 동네 사람들이 단 지파 사람들을 추격한다. 

 

18:25-26(단 자손들의 협박에 굴복하는 미가)

이런 위협적인 태도에 굴복하는 미가.
협박(25b절)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마라. 자기들이 훔쳐 가 놓고 이런 반응을 보인다.
미가의 반응(26절): “미가가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이스라엘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힘의 원리였다는 것이다. 힘이 곧 법이라는 것이다. 제사장이라는 사람도 이 원리에 딸 살아가는 모습, 이러니 이스라엘 사회가 질서도 없고 공의도 없고, 약자들이 피해를 당해야 하는 상황에 다다랐다.

 

단 자손의 라이스 점령(삿 18:27-31)

라이스는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인가, 아닌가도 모호하다. 학자들마다 의견이 나뉜다. 그렇지만 적어도 사사기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잘못된 우상숭배와 타락한 삶을 심판하시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도구로 삼으셨다. 적어도 사사기 18장에 언급하는 라이스 거민들은 그런 타락한 가나안 사람들과는 달라 보인다. 어쨋뜬 사사기 저자는 라이스 거민에 대해서는 동정적 입장을 보이고 이들을 잔인하게 죽인 단 지파에 대해 오히려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18:27 (단 자손의 라이스 진멸)

“한가하고 걱정이 없니 사는 백성(27a)” vs “칼날로 치며 불사름(27b)”
단 지파는 라이스 사람들을 진멸에 대상으로 여겼던 것 같고 그 근거는 제사장의 잘못된 신탁에 근거한다.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포장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악행을 포장한다. 훨씬 더 잔인하고 무섭다. 중세 기독교가 그런 잘못을 범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악들.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들 다 죽였다.

 

18:28(라이스 주민에 대한 설명)

시돈과 거리가 멀고...... 도움을 요청할 사람들이 없었다.

 

18:29-30(성읍 이름을 단이라 부르게 된 이유와 신상을 세움)

단 지파의 북쪽 이주가 언제 이루어졌는지 알 수는 없다. 학자들은 주전 2세기라 추측한다. 그래서 29절. 단이라고 한 이유. 30절. 자기들을 위하여. 우상을 세우는 것은 인간의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모세[므낫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18:30)”

그 사명감 없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다. 모세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충격적인 것이다. 어떻게 모세의 후손이 그럴 수 있겠는가? 하는 경건한 의도에서 모세의 단어에 한 스펠링을 첨가해서 므낫세로 하려고 한 의도가 히브리 원문에 보인다. 모세의 명성을 훼손하려 하지 않은 의도.


어떤 사본은 므낫세로 되어 있다. 레위인이기 때문에 모세의 손자로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히브리어에서는 할아버지, 손자라는 표현도 없다. 아들이라는 단어가 후손이라는 의미 함께 포함하고 있다. 모세의 손자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하면 곤란하다. 가나안 정착 초기로 보는데, 그렇지만 이것에 근거해서 가나안 정착 초기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아마 초기 사건도 있겠지;만, 어떤 특정한 시기를 한정하지 않고 혼란스러운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18:30 b)”

언제 일까? 모호하다. 사로잡힌다는 것은 포로로 끌려가는 것인데, 북이스라엘 포로인가? 남유다인가? 사사기가 기록된 시기는 북 이스라엘 멸망 이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표현을 여기에 쓰고 있을까? 이;것은 단 지파 사람들의 우상 숭배가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이 되었음을 보이는 것이다.

 

단 지파 입장에서 라이스 점령을 성공적으로 이룬 것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착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침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착각.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열왕기서는 그것을 강조한다. 벧엘과 단에 세워진 우상.

 


18:31(저자의 평가)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18:31)”
왜 실로의 하나님의 집을 언급하고 있을까? 이미 중앙 성소가 실로에 세워졌는데, 왜 다른 성소를 별도로 세우는가? 그것은 율법을 어기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단에 성소가 만들어지게 된 과정
한 사람 미가의 도둑질, 그리고 그 돈이 미가의 어머니에 의해서 우상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고, 단 지파 사람들이 그 우상을 강탈해 가고, 그 레위 제사장과, 그것을 무력으로 점령해 라이스 지역에 세우고 성소를 세움. 그 성소를 섬기는 사람은 사명감 없는 제사장.


하나의 잘못된 행동이 점점 커져가는 모습. 죄의 속성이 그렇지 않은가? 죄의 속성은 전염성. 죄와 죽음, 이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인류를 괴롭혀왔다. 죄의 노예와 죽음의 대한 두려움으로 일평생 떨면서 살게 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이 두 가지 고리를 끊어버리셨다. 십자가- 죄의 문제, 부활- 죽음의 문제 해결.

 

하나님의 침묵

이런 와중에 하나님은 보이지 안 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차지만, 하나님과 상관없는 행동을 보인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그들을 방치하셨다. 하나님의 침묵의 단계. 그것을 신학적으로 유기라고 한다. 롬 1장. 자신들의 욕심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대로 방치함. 시 81:11-12. 마치 사사들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무서운 심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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